작가탐구[02]작곡가 이재호'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었던 '한국의 타이

원 제목: 작가탐구[02]작곡가 이재호'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었던 '한국의 타이론 파워'
작가 탐구[02]작곡가 李在鎬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었던 '한국의 타이론 파워'
글/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가요평론가)


한국 가요계에 또 하나의 거대한 축, 이재호 선생은 작곡, 편곡, 연주 실력까지 고루 갖춘 당시 몇 안 되는 실력파 작곡가였다.
음악생활 내내 지병인 폐결핵을 앓았으나 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향년 42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음에도 눈부신 명곡들을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남긴 그의 삶과 작품들을 지금, 만나본다.

향년 42세, 그가 타계하자 곧 바로 추모앨범이 나왔다. 음반 타이틀은 그의 삶 그대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였다.



일제하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오늘도 걷는다마는...'의 나그네 설움,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린 나라를 탄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
우리의 옛 국토 고구려의 하늘 밑을 달리는 '노래하자 하루삔, 춤추는 하루삔'의 '꽃마차',
되찾은 광복의 기쁨을 가슴 벅차게 노래한 '귀국선', 6.25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부패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귀거래사를 읊은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의 '물방아도는 내력',
그리고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배인 '산장의 여인'까지...
이재호 선생이 한국가요의 요람기를 밝혀준 빛들은, 찬란하다.

이재호 선생은 타계한지 36년이 지난 1996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에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로 서훈 받았다.

함께 콤비를 이뤄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작사가이자 원로 가요인 반야월 선생은 ‘외롭게 자라서인지 평소에는 말이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듯했으며 술잔이 몇 순배 돌아야 그제서 말문을 여는 분'이라며 또한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을 되찾지 못했지만 늘 낭만이 넘쳤고 또 번뜩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았던 예술가'로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아주었더라면 가요계 판도는 또 한번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 평하며 아직까지도 그의 짧은 생애를 애석해 했다.

'진주’가 낳은 鬼才 , 이재호(李在鎬/1919.10.14-1960.7.3).
본명은 이삼동(李三同).

1919년 경남 진주에서 부친 이선직과 모친 함안 조씨 사이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형들을 잃고 고모와 누이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진주보통학교를 거쳐 진주고보를 나온 그는 어려서부터 바이얼린 주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아 37년, 동경의 우에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며 음악학도로서 꿈을 키운다.

귀국 후, 그의 나이 20세였던 38년, 고향 선배인 Okeh 문예부장 방예정(方藝丁)을 통해 '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을 스스로 지어 작곡 활동을 시작한다. 38년 후반 콜롬비아를 통해 첫 히트곡 '항구에서 항구로(박영호 작사/박향림 노래)'를 비롯해 '애수의 강변(김다인 작사/박향림 노래)' 등을 발표한 다음 해인 39년, 태평레코드에 소속되면서 필명을 '이재호'로 쓰며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통해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이 부른 '북국 5천K',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세세년년' '노래하자 하얼빈(꽃마차)',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마도로스 수기', 박향림의 '막간아가씨', 백난아의 '망향초 사랑' '갈매기 쌍쌍' '황하다방' 등이 그 것.

40년대 초 작곡가 전기현과 함께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조선 일대와 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연주단 지휘를 맡기도 했던 그는 1944년 12월,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전기현 등이 단원이 되어 활약하던 ‘하나(花) 가극단(당시 단장은 일본인인 花岡之義)’에서 무용수로 함께 공연을 다니던 진주 출신, 김정선(金貞瑄)과 결혼했다.

해방 직후 ‘귀국선’을 작곡, 건재함을 과시하던 이재호는 얼마 후 결핵치료를 겸해 고향 진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1947년부터 모교 진주중(현 진주고)에서 교편을 잡는데 그 자신이 대중가요 작곡가면서도 학생들에게는 결코 대중가요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신 명랑하고 씩씩한 노래, 희망을 주는 노래만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후에 작곡가 겸 연주가로 활동한 이봉조는 당시 진주고 재학 시절, 스승 이재호의 영향을 받아 음악생활을 결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진주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덕수이발관'에는 이재호의 사진을 확대해 걸어놓고 손님들의 헤어스타일을 견본으로 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멋쟁이였다. 심지어 학생들에 의해 붙여진 별명이 '한국의 타이론 파워'. 타이론 파워는 미국의 미남배우 이름이다.

그 무렵 그는 한 쪽 폐를 제거해야 했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교단을 떠난다. 그 후 6.25 당시에는 부산방송국인 'HLKB(현 부산 KBS-R의 전신)'의 전속경음악단장을 맡기도 했고 그 직후에는 태평레코드사 시절 명콤비였던, 이른바 ‘태평3총사’라 일컫던 작사가 반야월(가수명 진방남), 백년설과 함께 서라벌 레코드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이재호는 이후 '홍콩아가씨(금사향)'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아네모네 탄식(송민도)' '울어라 기타줄(손인호)'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또한 이 때까지만 해도 유행가를 저급문화로 보는 일부 지식층을 겨냥, 남인수가 노래한 ‘산유화’를 작곡, '이래도 대중가요를 천시하겠는가?'라며 대중가요에 대한 일부 시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고도 전해진다.

계속해서 남인수의 '무정열차' 그리고 최갑석의 '고향에 찾아와도' 등,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을 불태우면서도 술을 멀리 못하는 낭만적 기질, 그리고 결핵으로 인한 약값 등으로 주머니에는 전당표가 가득했다. 그러한 와중에 지병은 계속 악화되어 격리, 요양생활을 반복해야 했으나 그러나 병마도 그의 창작열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 무렵인 57년, 반야월 작사, 권혜경의 노래로 발표된 '산장의 여인'은 아름다운 멜로디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60년대 들어 반야월 작사로 발표된 노래들, '한 많은 낙동강(손인호)' '인천블루스(백일희)' '봄 없는 청춘(금호동)'을 마지막으로 필을 접고 60년 7월, 42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 직후 이웃에서는 집안을 소독한다고 법석이었을 만큼 그가 남긴 마지막 모습은 쓸쓸했다. 이를 뒤늦게 안 한국레코드작가협회에서는 서울 대각사에서 사십구제의 명복을 빌며 그를 애도했다.
아울러 타계 36년 후 문화훈장 보관장 추서 받았다.

한편 현재 부산 중앙동에서는 그가 남긴 노래 '경상도 아가씨(손로원 작사, 박재홍 노래)'의 노랫말 배경이 되는 '40계단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매년 6.25를 전후해 피난민의 애환을 그린 '경상도아가씨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와 함께 '꿀꿀이죽'과 '주먹밥'을 무료 시식하는 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가 남긴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해연 노래)'로 인해 서울 성북구청은 '미아리' 동명을 바꾸자는 제의까지 했었다.
'미아리'라는 지명은 어느새 '한 많은 미아리, 그리고 눈물고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못 박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이런 사례들은 그가 남긴 노래, 더불어 국민들이 애창하고 있는 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여전히 국민들에게 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가 남긴 노래들,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 이재호의 작품세계, 반드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우리 대중문화의 소중한 유산이다.
글/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Copyrights ⓒ 韓國歌謠作家協會報 2005. 6월.




by 가요박물관 | 2008/02/05 21:18 | [人物탐구總書]작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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